1. 연준의 유동성 공급과 은행의 원치 않는 몸집 불리기
연준이 자산 매입(예: 시중 국채를 사들이는 양적 완화)을 통해 시장에 달러를 공급하면, 이 돈은 결국 상업은행의 계좌에 '지급준비금'이라는 이름으로 쌓이게 됨.
- 강제로 늘어나는 은행 자산: 연준이 국채를 사면 그 대금(현금)이 은행 시스템으로 들어옴. 은행 입장에서는 손님의 예금이 갑자기 불어나는 것과 같으며, 이 현금은 은행의 '자산'으로 잡혀 전체 규모를 억지로 키우는 결과를 초래함.
- 규제 압박의 시작: 은행 규모가 커질수록 보완적 레버리지 비율(SLR) 기준을 맞추기 위해 보유해야 할 자기자본의 양도 늘어나 자금 운용의 부담이 커짐. 들어온 현금을 마음대로 굴리지도 못하는데, 덩치가 커졌으니 자기자본을 더 쌓으라는 압박을 받게 됨.
- 유동성의 역설: 돈이 시중에 풀리는데 정작 은행은 규제 기준을 지키느라 추가적인 대출을 꺼리거나 국채를 사지 못하는 '병목 현상'이 발생함.

2. SLR 규제의 정체와 BIS 비율과의 관계
SLR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이 위험 자산뿐만 아니라 안전 자산까지 무분별하게 늘려 덩치를 키우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최후의 보루' 격인 규제임.
- 동시 준수의 의무: 은행은 자산의 위험도를 따지는 BIS 비율(자기자본비율)과 자산의 양을 따지는 SLR을 동시에 지켜야 함. 축구로 비치면 BIS는 선수들의 반칙(위험 자산)을 관리하는 것이고, SLR은 경기장에 들어온 선수의 전체 숫자(전체 자산)를 제한하는 것임.
- 무차별적인 분모 계산: SLR은 대출금뿐만 아니라 가장 안전하다는 국채나 현금성 자산인 지급준비금까지 전부 똑같은 '자산'으로 취급함. 위험하지 않은 자산을 들고 있어도 은행의 덩치가 커지면 규제 대상이 됨.
- 강력한 억제력: 위험 가중치를 0으로 계산하는 BIS 비율과 달리, SLR은 국채조차 100% 자산으로 보기 때문에 국채 시장이 흔들릴 때 은행이 소방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됨.
3. SLR 임계치 도달 시 은행이 선택하는 '생존 전략'
은행의 자산 규모가 규제 한도(SLR 5%)까지 차오르면, 은행은 자본금을 더 확보하기보다 대차대조표의 덩치를 줄이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함.
- 국채부터 내다 팔기: 자산 총액을 줄여야 하므로 수익성이 낮은 국채부터 시장에 매물로 던짐. 대형 은행들이 국채를 팔기 시작하면 국채 가격은 폭락하고 시중 금리는 치솟는 금융 불안이 발생함.
- 대출 문턱 높이기: 기업이나 개인에게 나가는 대출 역시 은행의 자산을 늘리는 항목임. SLR을 지키기 위해 은행은 신규 대출을 중단하거나 까다롭게 심사하여 실물 경제에 돈이 돌지 않게 만듦.
- 시장 중개 포기: 은행은 국채 시장에서 사고파는 중개업자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규제 때문에 국채를 잠시라도 보유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며 시장의 거래를 끊어버림.
4. 미국이 'SLR 규제 완화'를 긴급히 검토하는 배경
최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발언이나 금융권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의 규제 체계가 국채 시장의 유동성을 저해하고 있다"**라고 하며 SLR 산정 방식의 개편 필요성을 강력히 시사함.
- 실제적인 시장 마비 우려: 현재 미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쏟아내고 있지만, 은행들은 SLR 규제에 걸려 이 국채를 받아줄 여력이 없음. 은행이 국채 매입을 거부하거나 보유량을 줄이면 국채 금리가 통제 불능으로 튀어 올라 전체 금융 시스템이 붕괴될 위험이 있음.
- QT 종료와 유동성 관리: 연준은 작년 말 양적긴축(QT)을 종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음. 긴축을 멈추고 시장을 안정시키려 해도,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여유(SLR 완화)가 없다면 시중의 국채 물량을 소화하지 못해 정책 효과가 반감됨.
- 은행과 연준의 이해관계: 규제가 완화되면 은행은 추가 자본 확충 없이도 국채를 더 보유할 수 있어 수익성이 개선됨. 연준 입장에서도 국채 시장의 '큰 손'인 은행들이 다시 움직여줘야 금리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음.
5. SLR 완화, 과거에도 있었던 일인가?
SLR 규제 완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이미 위기 상황에서 그 효과를 톡톡히 입증한 바 있는 전술임.
- 2020년 팬데믹의 기억: 코로나19로 시장이 얼어붙자 연준은 한시적으로 국채와 지급준비금을 SLR 계산에서 아예 빼주었음. 덕분에 은행들은 자산 규모 걱정 없이 국채를 사들였고, 시장은 순식간에 안정을 찾음.
- 상시화 논의의 쟁점: 과거에는 '한시적'이었지만, 이제는 국채 발행량이 워낙 많아졌기 때문에 국채를 SLR 산식에서 영구적으로 제외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음.
- 잠재적 위험성: 물론 규제를 완화하면 은행이 다시 과도한 레버리지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함. 하지만 국채 시장 붕괴라는 더 큰 위험을 막기 위해 금융당국은 '규제 완화'라는 카드를 진지하게 고려 중임.



